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生涯)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庭園)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女流作家)의 눈을 바라다 보아야 한다.
…… 등대(燈臺)에 ……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意識)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는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通俗)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시작(詩作), 1955.10)
‘목마와 숙녀’는 전쟁 후 인간다운 삶이 사라져 버린 현실에 절망하며 쓴 박인환의 후기 시로서 허무주의적 삶의 태도가 담겨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삶의 희망을 의미하는 ‘등대’가 등장하는데, 그것은 절망과 허무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시인의 내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등대’는 또한 이 시가 소재로 삼고 있는 영국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작가 버지니아 울프의 대표작 중 하나인 “등대로”에서 제목 일부를 따 온 것이기도 한데, 여기서는 낙관주의자인 램지 부인의 등대섬 여행 계획이 지연되고 좌절되면서 결국 그녀의 사후, 처음 계획이 세워진 지 10년이 지나 비로소 실행에 옮겨지는 이야기가 그려진다. 울프는 이 작품에서 끝내 희망을 놓지 않는 램지 부인에 자아를 투사하지만, 램지 부인도 죽고, 울프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인생은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여 한탄할 그 무엇도 없다고 하면서도, 박인환이 그렇게 비감해 하는 까닭은 자신의 자의식이 투영된 버지니아 울프가 문학을 통해서도 구원을 얻지 못하였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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