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박인환, '세월이 가면')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에서 '그 사람 이름'은 잊혀진(잊힌) 상태이다. 하지만 그의 존재는 잊혀지지 않았다. 이 둘은 독립적이며, '잊음'의 정도가 아니라 대상의 문제로 이 시에 등장한다. 이것이 이 시의 시작이며 끝이다. 잊혀진 이름은 그것으로 인해 이미 '무(無)'의 상태*1)이기 때문에 ..
흰 달빛자하문 달안개물소리 대웅전큰 보살 바람 소리솔 소리 범영루뜬 그림자 흐는히젖는데 흰 달빛자하문 바람 소리물소리 불국사는 신라 법흥왕 때 창건되어 경덕왕 때 지어지고 혜공왕 10년인 774년에 완공되었다. 일반적인 사찰과 달리 석가모니불(대웅전), 아미타불(극락전), 비로자나불(비로전), 관음보살(관음전) 등의 다수의 부처를 모셨을 정도로 규모가 큰 사찰인데, 건물로만도 이천여 칸에 이르렀다고 한다. 임진왜란에 불에 탄 이후로 쇠락을 거듭하다가 1970년대 발굴과 조사를 거쳐 일부가 복원되어 오늘에 이른다. 통일신라 시대를 맞아 국가의 중흥을 이루던 시기(신문왕-성덕왕-법흥왕)를 배경으로 하여 불국토를 현세에 이루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경주를 둘러싼 산들 가운데 동남쪽에 위치한 토함산 중턱에..
생활이 팍팍해지니돈이 숫자에서 진자(振子)로 바뀐다 거진 하루를숫자만 바라보는데 꿈뻑거리다가꿈틀거리다가뛰어내리다가 솟구치다가뒤틀다가 접히기도 늘어지기도 하는데매양 찰나를 노려 잡으려 하면여전히 잡을 수 없는 건 진자라서이고생활은 여전히 팍팍한 것은 숫자 때문인데 한 편의 영화를 흥분되게 무섭게 서늘하게즐겁게 보고 나서 끝인 것과는 다른 끝어느날은 그렇게 팍팍하였다(2026.03.)
너와 나 사이에그것이 있어야 한다아무렇지 않아도 되고어찌하지 않아도 되고그저 그 자리에 있기만 한다면그것 덕분에 너와 나 사이에넘치지 않을 만큼의 자리가 생기고너그러움이 생긴다면너의 공간이 생기고나의 공간이 생긴다면다만 그것이너와 나 사이에 있지 않고적당히 떨어져 있어서아름다운 삼각형을 이룰 수 있다면허용과 당위 사이에 빈틈이야 얼마든지얼마든지(202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