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박인환, '세월이 가면')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에서 '그 사람 이름'은 잊혀진(잊힌) 상태이다. 하지만 그의 존재는 잊혀지지 않았다. 이 둘은 독립적이며, '잊음'의 정도가 아니라 대상의 문제로 이 시에 등장한다. 이것이 이 시의 시작이며 끝이다.
잊혀진 이름은 그것으로 인해 이미 '무(無)'의 상태*1)이기 때문에 어쩌면 작품의 문제상황이 되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이 작품에서 '잊음'은 (우리의 일반적 생각과 달리 ) 인식의 문제가 아니다. 이름을 부르면 존재의 의미가 발생하고 그렇지 않으면 무상으로 돌아가는 그런 세계가 아니다.*2) 세상을 살아가는 가운데 수많은 생각하고 주목하고 기억해야 할 일들이 많아 차츰 관심의 대상에서 뒤로 물러서고 그러는 가운데 기억해야 할 관계의 연결고리들이 하나 둘 망실되면서 생각하려 해도 생각나지 않게 되고 또 희미해진 그 이름으로 인해 존재가 사라져 버린 그런 세계가 아니다.
화자에게는 그 사람 이름이 잊혀지고 생각 나지도 않는데 '그의 눈동자', '그의 입술'이 남아 있다. 잊었지만 지울 수 없는 세계가 '잊음'을 불완전하게 만든다. 화자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한다. 여기서 '잊지 못함'의 대상은 그 눈동자와 입술만이 아니라 그 밤의 체취, 그 밤의 무드, 그 밤의 밤공기 같은 것들이 모두 포함될 것이다. 이를 '그 밤'이라고 불렀겠지. 그렇기에 그 밤의 존재는 그 밤을 떠올리게 할 최적의 장면, 말하자면 그 가로등 그늘, 공연한 듯 보이지만 매우 사적이게 된 그 공간에서 있었던 그 사람과의 어떤 사연을 연상시킬 최적의 때(마땅히 그 밤은 바람도 불지 않고 비도 오지 않았으리라)가 아니더라도 현재화된다. 이것은 기억을 소환해서 잊지 않게 된 과거의 한 장면이 아니다. 그래서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다"고 했다면, 우리는 거기서 유산, 자취, 흔적 같은 것을 떠올리게 된다. 그것들은 사랑의 잔영(殘影) 이다. 어쩌면 그 잔영이 가 버린 사랑을 할 수 있는 한 오래 붙잡을 수 있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에 대해 우리는 다시 미련이나 추억 같은 이름을 붙여 준다. 그런데 '사랑은 가도'가 아니라 '사랑은 가고'라고 했으니, '사랑'은 사랑대로, 그리고 '옛날'은 옛날대로 각각의 역사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후자는 우리들의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사라지는 것은 그것에 대한 인식이고 기억이다.) 그래서 이 시는 화자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 그의 눈동자 입술은 / 내 가슴에 있네'
이 관계는 삶의 전반으로 확장된다. 기억은 마치 그 대상의 의미나 가치가 그 대상 자체에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중요하게 받아들여진다. 자기 동일성, 자기 정체성, 내가 여전히 나임을 믿을 수 있는 것도 기억에 의존한다. 세상은 변해도 기억은 변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게다가 내 의지에 따라 선택적으로 잊을 수는 없는 것이기에, 기억은 내가 붙잡는 얼마 안 되는 세상에 대한 나의 신뢰를 뜻하게 된다.*3) 하지만 그 믿음 안에서 기억은 또한 얼마나 취약한 것인가. 나는 선택적으로 기억하고 그 외의 것들을 잊는다. 그리고 그 기억조차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지게 된다. 이 잊음의 상황을 두고 말하자면, 무관심에서 비롯된 잊음(이것은 의미상 잊혀짐과 주어만 다를 뿐인 동의어로 사용된다.), 관심의 초점이 이동함으로써 부차적 효과로 발생하는 잊음, 기억 실패, 또는 부분적 기억 결손으로 인해 판명된 잊음, 기억의 연결고리가 끊어져 발생한 잊음, 기억이 혼종되거나 왜곡되어 결과적으로 남게 된 잊음,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항구적으로 잃게 되었음을 뜻하는 잊음 같은 것들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들이 모두 '잊음' 또는 '잊혀짐'의 맥락을 이룬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사랑이 잊혀진다.*4) 그것은 사라지는 것과 동의어이다. 그러는 동안, 내가 신뢰하지 않았던, 변하고 또 변하고, 계속 변한다고 치부했던 어떤 것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그의 눈동자'가 남아 있다. '그의 입술'이 남아 있고, 그것들로 이루어진 '가로수 그늘의 밤'이 남아 있다. 아무리 그것을 '옛날'이라는 이름으로 치부하여 희미해진 기억과 함께 떠나 보내려 해도 그것이 남아 있는 한 현재성을 갖는다. 사랑은 인식의 세계에 속하지만 옛날은 존재의 세계에 속한다.
시인은 이렇게 맞을 맺는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이것은 상실감의 표현이다. 그런데 이 상실감이란 사랑을 잃은 데서 비롯되기도 했거니와 '서늘함'에 함축된 '가슴이 비어 버린 것 같은' 감각적 상실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감각적 상실은 아이러니하게도 감각적 지각(시각과 촉각)과 맞닿아 있다. 따라서 이것은 기억과 망각의 이야기, 사랑과 인연의 이야기, 추억과 회한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의 의식이 통제하지 못하는 몸의 이야기이다.
한 걸음 더 들어가 본다. (논조를 확 바꾸어서)
'망각(忘却)'은 '잊음', 또는 '잊혀짐'의 가장 일반적인 한자어 표현이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이라고 했을 때, '잊음'은 망각했음을 뜻한다. 잊음을 나타내는 영어식 표현들(forgetfulness, amnesia, lethe, erasure, oblivion 등) 중에서는 'forgetfulness'가 일반적으로 대응한다. 하지만 이 작품 '세월이 가면'에서는 이것이 중대한 문제상황을 이루고 있다. <세월이 가면 그 사람 이름을 잊는 것처럼 그 사람과의 모든 일, 그 사람과의 모든 일에 관련이 있는 모든 것들이 잊혀진다.> 이 가정이 무너지고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졌는데 그 사람의 존재가 그대로임을 깨닫게 된다면 그것은 문제이다. 그에 대한 기억이 사라진 것이 그의 존재가 소멸된 때문이라면, 그것은 결국에는 귀결될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에 대한 기억이 사라진 것으로 인해 그의 존재가 소멸된다면 그것은 그의 실존 여부와 관계없이 그와의 관계가 영원히 끊어졌다는 것을 전제로 자연스럽게 여겨진다. 그런데 그에 대한 기억이 사라졌는데 그의 존재가 살아 났다? 이것은 통제할 수 없는 세계 속에 들어선 대사건이 된다.
이 문제적 상황이 앞서 언급한 '망각(忘却)'과 관련이 있다. amnesia는 기억 상실을, lethe는 안식(영원)을 위한 기억의 소멸을, erasure는 인위적으로 기억을 삭제시키는 것을 뜻하는데, 망각은 '망(忘)'에 이미 함의된 잊음뿐 아니라 끊어내고 물리치는 것(却)까지를 포함한다. '잊음'의 통상적인 의미를 forgetfulness로 풀었다고 하자. forgetfulness를 다시 우리말로 바꿀 때 대응하게 되는 단어 '망각'에는 그 전에는 없었던 존재를 지워버리는 잊음의 작용이 활성화된다. "아, 깜빡했어!", "잘 생각 나지 않는 걸"', "그 사람이 그 사람이었어?" 이럴 때 잊었다는 것은 비활성화된 기억, 기억 상실, 착각 같은, 의식 층위의 장애를 가리키지만, 망각(oblivion)은 존재의 소멸을 동반하기에 기억의 연결고리를 갖지 못한다. 망각은 (꿈도 꾸지 않는) 모든 것을 잊게 되는 상태, 곧 함축적으로는 죽음에까지 이르는 잊음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이 망각(oblivion)에 의해 우리의 의식(마음)과 신체(몸)의 관계는 일치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망각은 잊음과 동시에 사라졌다고 여긴 그 세계가 저 심연에 그대로 남겨져 있음을 고백한다. 사라진 것은 우리가 경험하고 의식하는 세계에서일 뿐, 우리의 의식 저 아래 한때 경험하고 의식했던 세계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우리 앞 세대의 삶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지층 아래 유물처럼 남겨져 공존한다. 내가 애증했던 나의 과거의 삶이 나와 함께 살아간다. 여기 귀신이 있다. 오래된 원한이 곁에 머물고 있다. 이것들이 모두 망각의 이야기이고 주제이다.*5)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잊을 수도 없다. 망각은 그 망각하고 있는 세계의 존재를 드러낸다. 이러한 개념틀에서 망각은 그 심연의 실재하는 현실을 갖는다. 그리고 시는 화자가 자신의 망각을 말할 때 그 심연에 여전히 자리잡고 있던 세계가 표면으로 올라오게 된 사태를 주목한다. 나는 시의 모티프로서 망각은 필연적으로 여기서 발생하는 아이러니를 주제화한다고 본다.
망각과 관련한 다음 예들을 검토해 보자.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2004)'. 찰리 카우프만(Charlie Kaufmann)이 극본을 쓴 이 작품은 18세기의 시인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가 쓴 시의 한 구절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죄 없는 수녀의 삶은 얼마나 행복한가
그녀는 세상을 잊었고, 세상은 그녀를 잊었네
흠 없는 마음에 영원한 햇살이 비치네
신은 모든 기도를 들어주었고, 그녀는 모든 소원을 포기했네*6)
작품의 제목은 원작의 맥락과 같이 기억을 완전히 지워 버린(티 없는 마음의)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 분)이 갈등과 이별의 슬픔을 잊고 다시 얻게 되는 행복(영원한 햇살)을 가리킨다.*7) 하지만 망각은 진실의 행복에 이르지 않음을 영화는 보여준다. 주인공이자 초점 인물인 조엘(짐 캐리 분)은 그녀와 다시 충동적으로(운명처럼) 만나 서로 사랑하게 된다. 영화가 보여주는 시간(기억)의 역진은 그 이후로는 다시 갈등하고 고통을 받고 이별하게 될 현실을 운명처럼(충동적으로) 겪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이것은 아이러니다. 망각하였으나 다시금 기억을 형성한다. 망각이 없애 버리는 것은 기억이지만 현실은 이별의 끝을 다시 만남으로 이끌며 기억을 소환한다. 이 영화는 망각 이후로 다시 이어지는 두 사람의 인연을 무의식에 남겨진 단서와 욕동으로 설명하는데, 이것을 우리는 존재의 영역에서 다시 발견한다. 그렇게 존재는 인식보다 우선적이다.
잘 만들어진 공포 소설들과 영화들은 평온이 찾아오면서 작품이 끝날 때 진정한 공포가 마련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이 진정한 공포는 공포를 망각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니까 공포를 잊는 것, 그것이 진정한 공포다. 공포의 근원이기도 한 미지(未知)는 SF 소설이나 영화의 기본 설정인데, 영화 '다크 시티(Dark City, 1998)'에는 매일 자정이 되면 세상은 일제히 잠이 들고 그 사이 도시는 새로운 모습으로, 사람들은 새로운 인물로 바뀌게 되는 외계 존재의 실험이 등장한다. 그 시간에 잠에 빠져든 모든 사람에게 이 실험은 현실이 아니다. 그들의 의식 속에 존재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어쩌다 잠 들지 않아 세상의 실체를 알게 되어 버린 몇몇의 사람이 있다. 그들에게 이 사태는 위협이며 공포이다.
차라리 눈 감고 귀를 막아 그 일이 없었던 것처럼 망각하려는 것이 손쉬울 수도 있다. '돈 룩 업(Don't Look Up, 2021)'이 지구의 종말적 대재앙 앞에서 짐짓 모르는 척하는 사람들을 통해 보여주는 세태가 그러한 것이다. 매트릭스(Matrix, 1999)는 사이퍼(Cypher)라는 인물을 통해 인간의 망각적 욕구를 공감하게도, 반감하게도 한다. 그는 스미스 요원 앞에서 스테이크를 먹으며 이렇게 말한다. "맛있어. 그리고, 어차피 매트릭스에서는 이 스테이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 하지만 매트릭스가 내 뇌에 이 스테이크가 육즙이 가득하고 맛있다고 입력해 주는 거지. 9년 만에 깨달은 게 뭔지 알아? 무지가 곧 행복이라는 거야." 그래서 앤더슨(Anderson)처럼 빨간약을 선택하고 네오(Neo)가 되어 고통스러운 현실을 목도하라는 것이 이 글의 주제인 것은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수많은 망각을 이미 거쳐 왔을 것이고 우리의 가능했던 현실들 중 여럿은 이미 우리 곁을 지나치고 있을지 모른다.*8) 우리는 순결함을 주장할 만큼 기억력이 좋지 않다. 중요한 것은 선택의 윤리이다.
망각이 단지 잊는 것의 문제를 다루는 대신, 오히려 망각된 대상(현실)의 존재를 부각한다는 것은 시 읽기에서 중요한 시사가 된다. 이성복의 '그날'은 '그날 우리는 모두 잊고 있었다'라는 시로 읽을 수 있고, 황지우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는 '새들도 세상을 뜨는데 우리는 모두 나는 법을 잊고 있구나'로 읽을 수 있다. 이 경우,
- 화자는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가?
- 화자의 발화는 어떤 어조를 보이는가?
- 서정적 주체는 화자를 어떤 존재로 규정하는가?
- '잊음'에 대해 말하지 않았는데 '망각'을 모티프로 보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 '망각'이 드러내는 '존재'의 세계는 어떠한가?
- 이 질문들을 통해 가장 중요해진 시적 발화는 무엇인가?
그날 아버지는 일곱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시에 학교로 갔다 그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날 驛前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날 아버지는 未收金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愛人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 占 치는 노인과 便桶의
다정함을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市內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이성복, '그날')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群)을 이루며
갈대 숲을 이륙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황지우,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 하는데 .... 앉는다
- 모두 병들었다 / 세상 밖으로 날아갈 수 있다
- 망각은 아무 문제 없는 정상적인 세상을 보여준다. 이 정상적인 세상은 망각 속에 존재하는 세계이다.
- 망각은 화자를 폭로한다.
- 화자는 자신이 망각에 대해 자각한다. 이 자각은 뼈아픈 아이러니이다.
- 세상은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라고 하기에) 기억하는 게 전부가 아니다.
(2026.03.)
이 글은 Astor Piazzolla의 'Oblivion'를 지나치게 몰입해서 듣다가 쓰게 되었다.
각주
1. 김광림의 시 '0'은 이것조차도 존재 영역에 있음을 말한다. "예금을 모두 꺼내고 나서 / 사람들은 말한다 / 빈 통장이라고 / 무심코 저버린다 / 그래도 남아 있는 / 0이라는 수치 // 긍정하는 듯 / 부정하는 듯 / 그 어느 것도 아닌 / 남아 있는 비어 있는 세계 / 살아 있는 것도 아니요 / 죽어 있는 것도 아닌 / 그것들마저 홀가분히 벗어버린 / 이 조용한 허탈 // 그래도 0을 꺼내려고 / 은행 창구를 찾아들지만 / 추심할 곳이 없는 현세 / 끝내 무결할 수 없는 / 이 통장 // 분명 모두 꺼냈는데도 / 아직 남아 있는 수치가 있다 / 버려도 버려지지 않는 / 세계가 있다" (김광림, 갈등, 심상사, 1973)
2. 지금까지 우리는 김춘수의 '꽃'이 보여주는 존재론적 세계관에 동조되어 왔음을 인정해야 한다.
3. 단지 대체될 뿐이다. 즉 다른 것들이 기억됨으로써 기억에서 차츰 흐려지고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기억은 내가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 없는, 세상과의 최소한의 객관적인 연결고리로서 여겨진다. (불완전한 기억은 의도치 않은 망각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합리화의 기제를 갖는다.)
4, 이 말 다음에는 다음 괄호 안의 진술이 담길 만하다. (다시금 말하지만 이것은 나의 책임이 아니다. 내가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다.)
5. 기억이 매우 다양한 어휘들로 세분화되어 있는 것에 비해 '잊음'은 일반적인 용례에서 망각 이외의 대용어를 거의 갖고 있지 않다. (영어의 경우와도 다르다.) 그리고 '잊음'은 대개 망각으로 대체해서 사용한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에게 잊는다는 말은 문화적 특이성을 바탕에 두고 있다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6. 우리의 논의대로라면, 수녀가 된 그녀가 포기한 것은 세상에서 얻고 싶었던 간절한 바람이었고, 그 포기는 망각에 해당한다. 원시는 망각으로 인해 행복을 얻었음을 말하고 있지만, 감독인 미셸 공드리(Michel Gondry)는 '포기'(망각)에서 '행복'의 아이러니를 보았던 것 같다. 말하자면 전도된 인유(inverted allusion)로 보인다는 것.
7. 제목이 갖는 의미와 이 글에서 다루는 망각에 대해 논의를 진행하기 위해 간략히 대강의 내용을 소개한다. 주인공인 조엘(짐 캐리 분)은 우연한 충동에 의해 한겨울 몬턱(Montauk: 미국 뉴욕주 롱아일랜드의 동쪽 끝 지역) 해안가를 찾고 거기서 클레멘타인을 만난다. 둘은 서로 사랑하게 되고 또한 각자 다른 성격으로 인해 고통을 겪다가 결국 이별하게 된다. 어느 날 조엘은 클레멘타인이 자신을 알아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기고 그녀가 실연의 고통을 잊기 위해 자신과의 일들에 대한 기억을 모두 지워 버리는 시술을 받았음을 알게 된다. 자신 또한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어 시술을 받게 되면서 그녀와의 이별과 갈등을 겪었던 일들을 하나둘 잊게 되지만, 과정이 진행될수록 차츰 괴로웠던 기억보다 행복했던 기억이 더 많아지며 조엘은 이 기억들을 잃고 싶지 않아 기억의 소멸에 저항하게 된다. 결국 그녀와의 모든 과거가 기억에서 사라진 다음 날, 조엘은 충동적으로 몬탁을 향해 가고 망각 이후 불안증세가 커지던 클레멘타인도 몬탁을 향한다. 거기서 두 사람은 만나 서로 사랑하게 되고......
8. 세상은 던전 크롤러(Dungeon Crawler)나 액션 RPG(Role Playing Game) 장르의 기존 게임들에서 우리가 들어선 개별 던전들에서만 NPC(Non-Player Character)들이 활성화되어 움직이고 반응하기 시작하는 것처럼 돌아가지 않는다. 우리가 알고 모름에 무관하게 세상은 움직인다.
'공부를 위한 준비 > 작품 더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작품 읽기] '목마와 숙녀', 박인환 (다시 읽기, 준비) (0) | 2026.05.29 |
|---|---|
| [작품 읽기] '마음의 달', 천양희 (0) | 2026.05.27 |
| [작품 읽기] '풀꽃', 나태주 (0) | 2026.05.25 |
| [작품 읽기] '불국사' (박목월) 읽기 (1) | 2026.03.25 |
| [작품 읽기] '도굴', 정지용 (0) | 2025.12.10 |
| [작품 읽기] '오감도 시제십일호' (이상) 읽기 (0) | 2025.12.10 |
| [작품 읽기] '기항지1'(황동규) 읽기 (0) | 2025.1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