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에 빨려들어가기 시작한 지구의 어느 한 지점, 거기 아직 끓어오르지 않은 강과 아직 타들어가지 않은 나무들이 잠깐의 유예 속에 떨며 기다리는 그때, 그쯤이면 뻘뻘 땀을 흘리며 극적인 포즈로 삽입에 여념 없는 한 사람도 있겠지 죽음이 오기 전 늦기 전 마지막 순간에 그때, 계속 미뤄지는 절정처럼 도대체 흥분되지 않는 고통스러운 노동 같기만 한 절망적인 존재 증명을 하고 있는 그때, 명분도 핑계도 없는 한 사람이 있는 것이겠지 너 말이야 쏟아져 내리는 들보를 간신히 붙들고는 지붕이라도 건사해 보겠다는 그때, 환상으로도 채울 수 없어 그저 애만 쓰고 있는 그때, (2014.12.24)
미약할 때 강한 것이 양심이다 하지만 양심의 근본을 알 수 없기에 미약함은 강함을 위장하는 것일까 어두울 때 빛나는 것이 양심이다 하지만 눈에 띄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 또한 양심이기에 어둠 속에 남는 것일까 선하고 고운 마음은 그저 미약하고 어두울 때를 기다려 순교의 준비를 하고 맹목으로 미약함과 미약함의 어두움과 어두움의 짝짓기를 시도하며 지상의 열흘을 보낼 때 독선보다 더 맹목적인 교조보다 더 맹렬한 양심이 비로소 아름다운 비행을 시작한다 (2014.07.07)
아지랑이 날듯 반딧불이 피어 오르는 저녁 동네길 걷다 빛과 바람에 이는 물결들에 이 작고 신령한 덧없는 생명을 외경하며 길가로 물렀다가 흠칫 왼뺨을 스치는 오른편 무릎에 부딪는 꼬물딱거리는 살아 있다는 움직임 불편한 촉감 못된 자식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벌레 같은 놈 흔하디흔한 딱정벌레 손으로 쳐 내고 소름 끼치고 안도하다 마음이 불편하다 (2014.7.7.)
꺾어진 백이라 세 번째 전환기를 첫 번째마냥 보내는 이즈음이다 투신하여 사회로 나오던 때에는 내 뜻이 아닌 뜻대로 교단에 서게 되었고 두 번째 인생 전환기에는 각종 질병 검사를 국가에서 받게 해 주었지 세 번째 전환기가 하필 꺾어진 백이라 꺾어진 오십 때와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본의 아니게 혼자 해결해야 할 것을 본의인 것마냥 혼자 하면서 의젓해져 가고 있는 게 꺾어진 백의 기백이다 사실 기백은커녕 백의 반도 안 되었다 (2013.08.11)
살던 집을 나와 새 집을 들어가는 길은 너무 멀다 너무 다르고 너무 틀리다 틀리다 '틀리다' 이 말이 이 경우엔 맞는데 역시 살던 집은 낡고 헐더라도 살던 집이다 남들이 알면 우스워할지 모르겠지만 살던 집은 집이고 살 집은 아직 집처럼 여겨지지 않는다 전전하며 긍긍하는 팔월의 늦은 밤 (2013.08.11)
한 번도 써 먹어 보지 못했던 이 말무릎 탁 치고 깨달았네시 따라 시인 가듯이시인 따라 시도 가네 얘기한 적 있었지행운이로세, 요절한 시인이란그는 죽어도시인에겐 영생이 요절하지 못한 시인은 살아서 심문이 잡혔다! 사진에 찍힌 저 시인시는 시인을 먹여 살리고시인은 시를 죽인다(2012.11.27) ^ 오마이뉴스 2012. 11. 27 기사 '이제 김지하의 시는.... '없습니다''(이명재)에서 따옴. ----------------------------------------아랫글은 오마이뉴스 2012. 11. 27일에 실린 이명재 님의 글 중 끝부분이다.이명재 님 덕분에 쓰게 되었다. "다 날아가 버렸다." 소리에 '눈'이 있고시에 '착상점'이 있다면,이 글에 선언이 있다. 무릎 탁 치고, 어이쿠, 태어나서..
따뜻하지 않은 봄날 날빛 드는 창가에 날지 않는 새가 떠날 줄 모른다 묻지 않는 너와 나는 대화를 한다 하루가 잠시는 짧았지말하고 밤은 꽤 길거야듣는다밤은 새삼 추울 거야말하고하루가 꽤 길거야 듣는다 창가에 연민이 머문다 어제는 내린 것이 비였을 거야비유의 장막을 들추면 너는아득한 목소리를 남긴다 새가 장막 속으로 난다날아가지 않는다 (2012.04.12) * 묻는 것은 내 구속의 집으로 그대를 데려오는 것이다. 묻지 않고 대화하는 먼 장면은 노부부의 티테이블처럼 우아하거나 집단적 독백처럼 무료해 보인다. 가까이 가 보면 시간이라는 신뢰의 끈이 그대와 나를 잇고 있다.
주머니 속에 종이 몇 장 잡힌다 카드 쓰고 받은 영수증영수증 같은 반으로 접힌 삼천 원톨게이트 영수증 영수증 같은 순번표 한 장하루가 몇 장의 종이로 손바닥에 앉아 있다 일부는 돈의 흔적으로 남고일부는 돈의 흔적의 흔적으로 남았다모든 게 돈으로 환산되고 나니다른 편 주머니 속은 충만한 허무 하루는 쏜 살의 촉 끝에서 바쁘게 앞서 가고종이들은 손바닥에서 날린다쫓아갈 수 없는 하루는 보내고대신 종이 몇 장 뒤잡는다바쁘게 쫓아가는 척(2012.0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