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쓰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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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뒷모습을 보다

작아진 뒷모습은 흔들리지 않고 발걸음마다 또렷했다 하지만 횡단보도 중간부터 나는 마음이 흔들려 되돌아서고 아닌 게 아니라 이십 년 가까이 이십년 공부 기간 동안 홀로 마음속에 경쟁 상대로 삼고 경쟁 상대가 되어 준 그것이 행복했던 이십년이 되었던 것이었지만 갑자기 되돌아선 것이다 공도 울리지 않고 수건이 던져지지 않고 스스로 작은 뒷모습을 하고선 길을 건너시는 것이다 달리 옮길 더 좋은 땅을 찾기 힘든 당신의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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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글빚 1

편지에 담긴 것이 어정쩡, 어쩔 줄 몰라 하는 포즈다 미안해 하면서도 답장을 못 보내는 내 표정과 비슷하다 하루의 끝과 짧은 밤을 알리는 천공의 불빛들, 긴 밤 아니더면 기어이 붙잡아 두고 있어야 할 새벽의 글빚들 (201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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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김치만큼 사랑해

수나야, 언닌데 언니 얼마나 사랑해 아니, 언닌데 언니라구, 응 언니 얼마나 사랑해 얼마나 사랑하냐구 뭐 응 김치만큼 사랑한다구 얘, 그런 말이 어디 있니 들었니 수나가 그러는데 날 김치만큼 사랑한대 웃기지 않니 김치가 뭐니, 김치가 (2009.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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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식육 식당

보은 지나서 상주 김천 넘어가는 길은 한창 배가 고플 때였다 불을 밝혀 식당을 찾아 내달리는 고개와 모퉁이들은 교대하며 식탐을 선동하고 갈 길은 여전히 멀었다 속도를 줄였다가는 내지르며 차는 반복하여 식육 식당들이 연이어 자리 잡은 더 깊은 길로 들어섰다 확고한 편견이 내 어깨 너머로부터 팔을 뻗어와 더 먼 곳을 향해 있었다 -- 거기 식육 식당에선 어떤 야만이 벌어지는 게요? 잘 갈린 칼 대신 도끼가 돌려 있을 법한 식당 주방이 언뜻 보이고 사라질 때마다 자취처럼 차창에 남겨진 '식육'에서 식인을 연상하고 식당 뒤켠 어딘가의 능지처사(凌遲處死)를 연상하고 소나 돼지의 고통스런 사람 흉내를 연상했다, 초파일 연등처럼 식육 식당들이 그림자를 흐려 가며 쫓아오고 차는 가슴을 움찔거리다 내달렸다, 경험이 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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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어이쿠

시험 삼아 써 본 시 종이 한 장 떼어 적어 두었네 '어이쿠' 하는 대목에서 하루를 묵혀 두었다가 사라져 버렸네 종이 끝에 걸쳤던 '어이쿠' 혼자 하루를 묵고는 시는 생활이 되고 생활은 매우 시적이라 운만 뜨면 술술 나오네, '어이쿠' (200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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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풀다

집으로 돌아와 연달아 아홉 번을 방귀 뀌었다 크고 작은 방귀들이 비로소 제 소리를 찾았다 맞지 않는 인간들에 응대하느라 억누르던 방귀가 세 번, 묻지 않는 학생들을 견뎌 내느라 참고 있던 방귀 한 번, 거기에 체면 때문에 방귀 두 번, 소소한 일들에서 뀌다 말고 그만 둔 방귀들까지 도합 아홉 번이다 이걸 참느라 온갖 구질한 냄새와 싫은 소리 내뿜었다 그걸 감추느라 짐짓 모르는 척하는 표정과 엉뚱한 관심 내보였다 (2009.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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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벽

선선히 열리지 않는 문 손잡이 돌려 밀어도 열리지 않는 문 몸으로 밀어내려 해도 꿈쩍 않는 당겨도 열리지 않고 끌어도 열리지 않는 문 결국에는 너는 너 혼자뿐인 내가 그려 넣고도 그림의 떡이 되어 버린 문 열리지 않아 좌절하는구나 천국의 문 경주하지도 않고 쟁론하지도 않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서 있는 (20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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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시를 쓰거나 당신과

시를 쓰다가 그렇지, 밥상 앞에서 당신과 마주 앉아 당신을 보면서 얘기를 하거나 혹은 듣거나 전화기를 내려놓고 당신과 마주 앉아 잠시 물어보자고 당신이 주는 힌트를 시에 걸쳐 놓고 늘어지기 전에 한 줄, 그리고 놓치기 전에 한 줄 마주 앉아 당신과 얘기를 하거나 혹은 듣거나 쓰자고 (2008.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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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그 해 여름

그 사람은 옛날 눈부신 여름 무작정 버스에 올랐던 여행의 종착 낯선 동네엔 햇살 가로수 햇살 아래 눈부신 자태 가만히 듣던 모습 아득했던 길었던 한낮 향기롭던 눈부신 젊은 날 무작정 버스에 올랐던 여행의 시작 (2008.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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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2

존경하는 재판장님 존경하는 의원님께서 존경하는 의원님 하고 부르는 걸 못하게 막아주세요 존경하는 의원님은 존경하는 의원님 하고 부르기는 해도 한 번도 존경 않는 의원님 하고 부르지는 않아요 답답한 의원님 한심한 의원님 멍청한 의원님 하지도 않고 앉으나 서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존경하는 의원님, 네, 존경하는 의원님 하면서 매번 시간을 저당하고 있네요 아마 다 모으면 존경하는 재판장님 (2008.09.08)

misterious J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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