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에 부는 바람 불온한 기운 전혀 없는 건조한 바람 시청 앞 광장을 헤매다가 태평로 앞을 되돌아나올 땐 아무의 바람 마저 갖지 않게 된 늦은 오후의 바람 큰 길을 따라 내려오다가 계절이 바뀌는 바람에 길을 잃어 버린 바람 그 너머 국일관 앞길에 울리던 구호를 자욱히 덮어 버렸던 바람 그 너머 비 내리는 종오 거리에서 신문팔이 소년 떠밀고 지나갈 때부터 있던 바람 사라진 거리에서 버젓이 불고 있는 바람 한 사람의 잘못이 가져온 시작은 아주 작았던 어긋남 (2008.09.04)
- If I have a hammer(peter, paul and mary)의 몹쓸 변주 기도하자 내게 만약 쥘 수 있는 주먹 있다면 꼭 해야 할 일 있노라고 애써 손 내밀지 않고 불면의 낮과 밤 바꾼 두 손의 축복 감사히 받아들이겠노라고 만약 내게 쥘 수 있는 주먹이 있다면 가슴을 툭툭 쳐 내가 가진 믿음을 증거하며 쥘 수 있는 주먹 있다면 그 주먹 불끈 쥔 팔을 들어 내보이겠노라고 만약 쥘 수 있는 주먹 있다면 당신들을 일으켜 세우고 여전히 힘이 남아 쥘 수 있는 주먹 할 수 있는 일이 남거든 착각과 오해의 벽을 깨뜨려 다행히도 좀 더 강한 쥘 수 있는 주먹을 기억하게 하겠노라고 당신들이 내 쥘 수 있는 주먹을 떠올렸을 때 그 기억 속에 나는 없고 주먹만 남았을 때 당신들이 온전히 기억해야 할 일 그..
색색이 늘어진 비닐 차양 뜨거운 햇살 피해 들어선 어둑한 실내 비닐 커버의 낮은 소파 엽차잔 옆에 놓인 수란 얹힌 하얀 잔과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 상사 꽃무늬로 멋을 부린 셔츠에 밀집 모자 흰 구두 눈부신 거리 뜨거운 공기 피어오른 먼지 위로 흩뿌려지는 한 바가지 물 밀짚모자 쓴 아버지 뒤를 바짝 붙어서 밀짚모자 쓰고 따라들어간 어두운 뒤편에는 당신들이 아련하게 마음에 둔 20년대 카페와 나의 60년대 다방 이십 세기 초입에 태어나 가장 먼저 근대를 호흡했던 당신들과 만날 때마다 매번 엇갈리면서도 이해하는 척할 필요도 없이 자연스럽게 당신들과 이야기 할 때마다 60년대 세대의 애틋한 기억들 역사를 반복하는 것처럼 호흡할 때마다 당신들을 읽는 60년대 세대의 감수성이 당신들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
하필 그때 방송에 나온 구질구질하고 유쾌하던 이 잡는 얘기에 어린 시절 겨울 화롯가에서 옷 벗어 불에 쬐며 똑같은 경험을 했던 얘기를 덧붙이며 신나게 꺼내들다가 택시운전기사 아저씨와 키득거리다가 궁금해졌다 내가 가르치는 스무 살 청춘들과는 소통도 되지 않는 이야기로 신이 나 있는 나의 기억 속의 이들은 어디 갔을까 증명도 할 수 없고 옛이야기로 물릴 수도 없는 이 생생한 허구가 내 기억 속의 온갖 사태들을 호출해 낸다 이 어정쩡한 사십대는 한때 유신 시대 끝물에 떠밀려 칠십구년 시월이 우울하도록 강요당했고 책을 덮고 그 대신 책을 꺼내 읽으며 그러면서도 책을 부둥켜안고 놓치지 않으려고 거리에 나가서도 팔사년, 팔오년, 팔육년, 팔칠년 시간의 능선 아랫길을 조심조심 걸었더랬지 황공하게도 삼팔육이라는 이름에..
- 고개를 돌리지 않고 영화를 끝까지 견디게 하는 여섯 가지 기술 이런 생각을 했을 거야, 감독은 미국 사람들이 흔히 갖다 붙일 이유가 없을 때 이러잖아, 잘못된 시간, 잘못된 곳이었을 뿐야 어쩔 수 없이 위험에 빠진 미진은 어쩔 수 없잖아, 죽을 운명이었어 죄 없이 남의 안부에 관심이 많고, 지나치게 타자와의 유대에 의존하면 그것도 죽을 운명이지 이런 엑스트라적 인생을 위해서는 죽는 순간쯤은 곧바로 건너뛰게 할 영화적 기법이 있어 저마다 고독한 비정, 몹쓸 세상에서 미진 그녀의 어린 딸이 손을 내밀면, 그런다고 잡아줄 수는 없는 거야, 아마추어 같이 슬픔을 견디기 어려운 자에게는 비를 우는 소리 고통스러운 자에게는 라디오 음악을 친절하게도 교통사고와 깊은 잠을 함께 제공하는 자비, 가능하면 그것도 그냥..
사십이 되자 아내는 마음먹었던 대로 학생이 되었다 다들 부러워하는 시간을 얻었다면서도 아주 죽을 맛이라며 학교를 다니고 있다 가정은 나에게 맡긴다고 선언했던 그녀는 가엽게도 선언만 하고 끝냈다 아침이 되자 여전히 주부였고 다들 깨우는 일이 여전히 그녀의 몫이었다 아이들은 그녀가 학생이라는 걸 별로 의식하지 못했고 나는 월요일마다 짐 싸기에 바빴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학생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게 아내의 사십이다 가슴에 작은 고양이를 안고 파란 스웨터 까만 테 안경 고개를 약간 숙이고 아름답게 남겨진 아내의 이십대의 시절이 사진에 새겨져 있다 나에겐 그것이 학생을 막 끝낸 그녀의 모습이다 하지만 사랑한다는 말이 쑥스럽게 된 나이 사십이 다들 거쳐 가는 나이 사십이 아내를 막 지나치려 한다 사십의 아내는 ..
노트북은 간편하라고 준비해 놓고 키보드가 작아 어색하다 어색하지만 노트북보다 더 큰 키보드를 꺼내 키보드 앞에 키보드 놓고 글을 쓴다 쓰지 않는 키보드는 먼지 먹어 쓸 수 없고 쓰는 키보드는 거추장스러워 갑갑하다 노트북은 골렘처럼 커 간다 나갈 일 있어 노트북을 챙기려면 도무지 가방 안이 또 갑갑하다 그냥 책상 위에 놓아두고 이 모든 건 저 쓰지 않는 키보드 탓이다 (2008. 03)
우공이 산 처럼 앞에 놓여 있다 돌아갈 수는 있지만 그럴 수는 없는 우공이 산 처럼 두터운 시집을 건네주시며 별 말씀도 안 하신다 지난 번 여행시초를 시초(詩草)라 하셨을 때 우공이 산 으로 들로 다니실 때만 사진에 시를 담았던 것이 아니라는 질투가 샘 솟았다 이게 시라도 되었으면 질투가 나의 시라도 된다면 우공이 산 과겸자 (2008. 3)
노트북은 간편하라고 준비해 놓고 키보드가 작아 어색하다 어색하지만 노트북보다 더 큰 키보드를 꺼내 키보드 앞에 키보드 놓고 글을 쓴다 쓰지 않는 키보드는 먼지 먹어 쓸 수 없고 쓰는 키보드는 거추장스러워 갑갑하다 노트북은 골렘처럼 커 간다 나갈 일 있어도 노트북은 키보드 없이 나가지 못한다 도무지 가방 안이 또 갑갑하다 그냥 책상 위에 놓아두고 이 모든 건 저 쓰지 않는 키보드 탓이다 (2008. 03)
오후는 아직 멀고 나는 집을 나서 살던 옛 동네 응암동의 언덕을 향한다 거기엔 언제나 까만 염소의 등을 쓰다듬고 있는 빵모자 쓴 꼬마 아이가 있다 아이는 언덕 아래를 말끄러미 내려다보며 작고 동그란 눈을 빛낸다 미안하게도 나는 아이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 아마 그건 아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이의 어깨를 짚을 수 없는 멀지 않은 거리를 두고 나는 아이의 내일을 마치 아이가 나의 어제를 비추어보듯이 비추어본다 아이는 언덕을 내려와 세상에 집을 짓는다 집 너머로 멀리 산이 보이고 그 앞에 언덕이 있다 아이는 꿈을 꾼다 앞산 너머에 바다가 있다 아이는 언덕을 향해 내달린다 앞산 너머에 태양이 숨어 있다 한 패의 소년들이 집 앞으로 몰려든다 열세 살 소년이 별을 달고 여덟 살 소년이 나무 기관총을 매고 여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