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동산 청솔잎을 빗질해주던 바람이무어라 무어라 하는 솔나무의 속삭임을 듣고푸른 햇살 요동치는 강변으로 달려갔다 하자.달려가선, 거기 미루나무에게 전하니알았다 알았다는 듯 나무는 잎새를 흔들어강물 위에 짤랑짤랑 구슬알을 쏟아냈다 하자.그 의중 알아챈 바람이 이젠 그 누구보단앞들 보리밭에서 물결치듯 김을 매다이마의 구슬땀 씻어올리는 여인에게 전하니,여인이야 이윽고 아픈 허리를 곧게 펴곤눈앞 가득 일어서는 마을의 정자나무를 향해고개를 끄덕끄덕, 무언가 일별을 보냈다 하자.아무려면 어떤가, 산과 강과 들과 마을이한 초록으로 짙어가는 오월도 청청한 날에,소쩍새는 또 바람결에 제 한 목청 다 싣는 날에. 1. ○ '전언'. 전하는 말. 발신자의 메시지가 수신자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이를 전달할 전언자가 개입한다는 말..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요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 김소월, 일반적으로 우리가 경험한다고 여기는 공간은 구획되어 있는 장소로 이루어져 있다. 구획됨에 의해 공간은 나뉘고 각 나뉜 공간들은 기능적으로 구분된다. 또한 나뉜 공간들은 나뉘어져 있음으로 해서 생기는 정체성을 공간의 중심에 둔다. 그 정체성의 힘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 공간은 구획되는 경계를 갖게 되고 그 경계 내부에 정체성의 거주지를 만드는 것이다. (김소월)에서 '저만치'라는 심리적 거리를 읽어낸 김동리의 해석은 꽤나 설득력 있는 시도였다. 이 어휘가 조성하는 거리감은 닿을 듯하면서도 닿..
주민센터에 들어서자 그 중 누군가의 눈빛이 빛난다빛났을 거라 생각한다그는 그의 빛나는 눈빛을 숨길 수 있었을 것이므로그는 특별한 평범한 사람이다9급 지방공무원으로 접수대 앞에 앉아 있지만5급 국가공무원 급의 명예와 4급 국가공무원 급의 책임감으로모 국가기관에 채용된 지 10년 차 비밀요원이다 일종의 파견으로 저 자리에 앉아 있는 그는언제나 평범한 모습으로위장하고 있다 이를테면 그렇다는 거다나는 그의 존재는 알지언정 그가 누구인지는 모르므로저 접수대 앞에 앉은 평범한 일곱 명의 한 사람으로 저렇게 앉아 있는 것이다혹은 일곱 명 전부일는지도 모르지 그는 첨단 정보 기술을 훈련 받지 않았다그랬더라면 7년 묵은 컴퓨터로 AR VR에 못 뽑아내는 정보가 없는그의 신통한 능력이들통나지 않을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그는..
대형 빌딩 입구 회전문 속으로 사람들이 팔랑팔랑 접혀 들어간다 문은 수납기처럼 쉽게 후루룩 사람들을 삼켜버리고 들어간 사람들은 향유고래의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간 물고기 떼처럼 금방 잊혀진다 금방 잊혀지는 것이 그들의 존재라면 언젠가는 도로 토해지는 것은 그들의 운명, 그들은 잘 삭은 음식 찌꺼기 같은 풀린 표정으로 별빛이 돋아나는 시간이나, 또는 그 이전이라도 회전문 바깥으로 밀려난다 그렇다니까, 그것은 향유고래의 의지 때문이 아니라 빨려들어간 물고기 떼의 선택 때문이지 오로지 그들 탓이라니까 그러나 대형 빌딩은 이런 무거운 생각과는 멀리 떨어져 하루종일 팔랑팔랑 회전문을 돌리면서 미끄러운 시간 위에서 유쾌하게 저의 포식을 노래한다 룰루랄라 룰루랄라 룰룰루…… 지금은 회전문의 움직임이 완고하게 멈춘 시간..
삶은 계란의 껍질이 벗겨지듯 묵은 사랑이 벗겨질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먼지 앉은 석경 너머로 너의 그림자가 움직이듯 묵은 사랑이 움직일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새벽에 준 조로의 물이 대낮이 지나도록 마르지 않고 젖어 있듯이 묵은 사랑이 뉘우치는 마음의 한복판에 젖어 있을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 김수영, 1연 또 역설에 대해 글을 쓰게 되었다. 쉽지 않은 주제이다. 하지만 오늘 쓰는 글은 어려운 주제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지극히 단순한 혼동에 관한 것이다. 역설에 대한 지식이 잘못 투입되는 예를 확인하는 것이다. 김수영의 는 밭에 심은, 어느 덧 말라 죽은 것 같은 마른 파..
작품에 대한 풀이들을 본다. 인터넷 검색을 하면 목록의 상단에 올라오는 풀이들을 말하는 것이다. 풀이들이 가리키는 부분은 매우 국소적이다. 예를 들어 '~습니다'에 밑줄 쫙. 대상에 대한 존중과 존경의 마음을 담아 냄. 이런 식이다. 여기에는 '-습니다/-ㅂ니다'에 대한 문법적 정보 이상이 담겨 있지 않다. 이것이 작품에 대한 어떤 이해의 도움이 된다는 걸까? 물론 작품 이해를 위해서는 상향식이든 하향식이든 먼저 해독이 되어야 할 것이므로, 그런 의미에서 밑줄의 각별함을 생각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아울러 이 경우 왜 하필이면 이 어휘들에 밑줄일까, 이 정도면 작품의 모든 어휘들 밑에 밑줄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의구심이 동반되기도 한다. 잉여적 지식이라도 작품 이해에 방해만 안 된다면 없는 것보..
일상의 아이러니이상, , 박세영, , 이성복, , 기형도, 1 ‘일상(日常)’은 날마다 반복되는 생활, 혹은 항상 그러함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니 딱히 주목할 만한 대상도 없고 그렇게 만드는 눈에 띄는 어떤 것도 없다. 어떤 일도 일어나고 있지만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 그래서 오히려 무상(無常)할 뿐이다. 그런데 문득 빈틈이 하나 보인다. 일상의 빈틈 사이로 일상의 질서를 뒤흔드는 낯선 무엇인가가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보았다고 확신하게 되었을 때, 그러니까 더 이상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을 때, 우리는 다음 두 가지 반응 중 어느 하나를 택하게 된다. “모든 것이 가짜야, 트루먼. 모든 사람이 너를 알고 있고, 이 모든 게 널 위해 만들어졌지.” - “의사 체험도 꿈도 존재하는 정보는..
(2023년 3월 25일 서울대에서 열린 한국어교육학회 제295회 전국학술대회의 기조강연으로 발표한 내용입니다.) 피와 혁은 둘 다 가죽을 뜻하는 한자이다. 피(皮)는 짐승의 가죽을 털이 있게 가공한 것을 말한다. 여우의 껍질로 목도리를 만들거나, 호랑이 가죽(虎皮)으로 옷이나 깔개를 만든 것을 이른다. 이렇게 모피(毛皮)는 짐승의 털을 그대로 살려서 가공한 제품을 말한다. 혁(革)은 소가죽 등으로 짐승의 털을 모두 뽑아 없앤 상태로 가공한 가죽제품을 혁이라고 한다. 혁대나 구두, 장갑, 가방, 가죽점퍼 등을 만드는데 염색까지 하여 짐승의 피(皮)와는 전혀 다르게 만든 제품을 혁(革)이라고 한다. 혁명(革命)에 가죽 혁 자를 쓰는 이유는 제도(制度), 경제(經濟)의 조직(組織) 따위를 급격(急激)하게 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