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

시 쓰고 웃었다

[자작시] 어느 오후의 분위기

바람은 시시각각 방향을 바꾼다지만나에게는 언제나 같은 방향이다바람을 마주대하기로 했을 때가야 할 방향을 정해둘 까닭이 없다다르게 부는 게 바람의 생리인 듯해도 바람은 항상 같은 방향으로 분다 바람에 묻어 있는 냄새는산에서 내려오는 것과 골목을 훑고 나오는 것이다르다, 길 건너는 횡단보도의 노란 페인트 줄무늬 위에서 다르고 첫 번째 골목인가 힐끗거리다가 갑자기방향이 바뀌어 두 번째 골목으로 들어설 때도다르다바람이 기억에조차 없는 옛동네로 나를 인도할 때알 수 없는 방향에서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는다만 나는 바람에 묻은 무수한 냄새들을 따라 바람의 길을 찾는다 항상 거기 있을 것만 같은 동네로 바람이 나를 이끌리라하지만 바람은 수시로 방향을 바꾸고 나는 그곳이 어디인지 모른다 바람은날카로운 수백 개의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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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시] 고장난다

서울 밝은 달 지는 새벽 못 마친 일을 남기고 자리에 들었을 때 딱 걸렸다 너는 ㅡ 헐고 약해진 몸이란 어찌할 도리 없는, 이미 벌어진 순리 ㅡ 다들 그렇게 나이가 들어가는 ㅡ 잠도 안 오는데 깨어 있는 ㅡ 책상 위에 아직 끝내지 못한 일들이 남아 있는은밀한 손길로 다시 안경을 찾아와 건네줄 때너는나를 고장내고 있었던 게다 그리하여 방금 나는 고장나고 있는 몸의 경과를 목격하게 된 것이다 내 것 아닌 양 빼앗고 은밀히 언젠간 버릴 요량이었다가 들켜버린 채 멀쑥한 표정으로 어깨를 한 번 으쓱거리며 나와 같은 곳을 보고 있는 너는 (202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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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시] 사랑의 블랙홀 ㅡ 시 쓰기에 대하여

시라고 쓰는 데 이어쓰다가 다시 행을 내려쓰면 같은 뜻인가 다른 뜻인가 이어쓰고 내려쓰는데 뜻이 달라지면 뜻이 달라서 내려쓴 것일까 내려쓰고 보니 뜻이 달라진 것인가 사랑의 블랙홀 여섯 시면 다시 시작되는 반복의 세상매번 다른 선택이 처음으로 되돌리려는 시도고쳐 쓰기를 하면새로 쓰기가 따라와서고쳐 쓰기를 실패하게 되는 시 쓰기의 딜레마시라고 쓰는 데 이어쓰다가 다시 행을 내려쓰면 같은 뜻인가 다른 뜻인가 이어쓰고 내려쓰는데 뜻이 달라지면 뜻이 달라서 내려쓴 것일까 내려쓰고 보니 뜻이 달라진 것인가 (20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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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시] 비가 와도 젖는 자는 ㅡ 오규원의 시가 어려워서

전운이 깔린 저녁이다 전황이 질척일 낌새다 흉흉한 소식을 전하는 전령 같이 밤 바람이 지나자 배수진마냥 도로를 뒤로 하고 희고 검은 참호들이 진지전을 펼친다 ㅡ 하지만 그들은 이동한다 ㅡ 참호마다 눈을 밝히고 짧은 사이렌을 수시로 울려 공습에 대비하는, 준비된 자들이 그 참호 속에 있다 ㅡ 그들은 이동한다 ㅡ 이내 대규모 공세가 시끄럽게 방어진을 흔들겠거니 하던 예상과 달리 하늘은 조용히, 거스를 것 없이 지상에 강림한다 ㅡ 그들은 어디론가 이동한다 ㅡ 그들은 떠나고 벽과 담들은 무너져 버린 전세를 보도한다 하늘은 지상을 거의 점령했고 간신히 남은 전선의 중간지대에서 담배 한 대 피울 동안의 낭만스런 능청을 연기할 여유도 빼앗기고 참호에서 내쫓겨 잠시 담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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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시] 웃으세요

웃으세요 과도하게 낙천적이세요이 구물거리는 하늘 아래서새삼 좋은 표정아(2019.03) * 조커의 웃음은 이 시의 화자의 그것에 대응한다. 말하자면, 어찌 그렇게 낙천적인 웃음이 가능한 것인가 되묻는 것이다. 그러니 1연에서 '웃으세요'는 '(내가 보니 당신은) 웃으시는군요!'이거나 '웃으시는 거예요?'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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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시] 내게 강 같은 평화 - 장정일의 '삼중당문고'풍 엘레지

잃어버린 많은 노래들 중에 한 자리 차지하는 복음성가, 내게 귀를 울리고 이내 마음을 울리는 복된 소리여야 해서 그걸 다시 노래로 엄숙하게 예배의 의식으로 부르는 게 이상해 보이는 복음성가, 복음이 마음으로부터 울려나와 곡조를 갖게 된 것이 아니라 자기암시를 강하게 걸어 간절하게 염원하며 불렀어야 했으니 어울리지 않는 복음성가, 그중에 그다지 평화롭지도 않으면서 간신히 흐르는 물길 같은 평온이라도 찾으려 불렀던 이 노래, 복음성가였던 것일까, 'We shall overcome'보다 더 긴장되고 맹목이었던 이 노래, 부흥회 분위기와 어울렸던 이 노래, 대학에 들어가면서 더 이상 부르지 않게 된 이 노래, '님을 위한 행진곡'이 가져다 준 평화, 강 같은 평화 넘치네. (20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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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시] 발톱

손톱만큼 작은 것이손톱보다 강하다며 방바닥에 위세를 떨쳤겠다손톱보다 험한 일을 한다면서도 손톱만큼 자주 깎이는 건 거부했겠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보이는 곳을 지향한다며 은밀히 내 양말을 구멍 내고 있었겠다 서서히 네 본 모습을 드러내면서 (2018.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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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시] 방학(放學)은 죽은 것임에 틀림없다

강의를 모두 끝냈다내게 또 다른 4시간, 또는 24시간이 생기지 않았다과제를 내어 주고 과제물을 받았다한 장 한 장이 숙제처럼 도무지 넘어가지 않았다미뤄 두었던 상담 계획을 다시 세우기도 전에학생들이 집으로 돌아갔다미뤄 두었던 논문들을 진행하기도 전에학술대회 발표의 기억들이 사라지고 있었다새벽은 어제와 다름없이 흰 벽지만큼 밝고그 틈에 더위가 장마와 함께 밀려왔다나는 며칠 입은 후줄근한 바지를 다시 입고샌들을 신고 점심 때 가까이 되어 출근했다그것이 나의 소심한 반항이었고,연달아 세 번의 회의가 무관심한 관심의 표정으로나의 외모를 관조했다(2018.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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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시] 명당자리

선생님의 침이 튀는 곳이 명당자리입니다 그렇군요 생명수 생명의 말씀 은혜를 폭포수 같이 입기 위해 나란히 줄지어 선 자리의 끝자리의 이슬이라도 묻기 위해 애쓰는 그곳은 그래도 명당자리, 그 가느다란, 알 수 없는, 동아줄 - 딸의 졸업식장에서 교장님의 말씀이 오직 공기로만 전달되는 끝자리에서 자리에 대해 얻게 된 깨달음 (2015. 3. 19) * 왜 이 두 사진이냐고 묻는다면, 결국 저 침 튀기는 거리만큼 가까워지기 위해 필요한 것이 같기 때문이라고.....* 왜 사진들이 적당히 과거의 것들이냐고 묻는다면, 다 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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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시] 집나들

터부터 잡고 집안 돈을 다 그러모았던 공동의 단독 주택 멀지 않아도 가 볼 엄두가 안 났던 말뿐인 전원주택 그 새 헐고 퇴색한 언덕 위 하얀집 팔기도 어렵고 손 대기도 힘든 이 집을 한 달만에 찾아왔다 쓸데없이 누가 있소 하고 들여다 보고 이곳저곳 들춰보고 실망하고 그제야 설렁설렁 집 생활인 듯 일을 벌인다 나름 텃밭 흉내 내며 심어 두었던 배추 고추 깻잎대는 거반 시들고 무엇과 무엇과 들국화 제 멋으로 자라 힐난과 칭찬을 겸한다 결국 되돌아올 것을 (2018.06)

misterious J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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